한강, <흰>, 문학동네, 2018
유지원, <글자풍경>, 2019, 을유문화사
내가 좋아했던 것은 종이에 인쇄된 그래픽과 잘 정돈된 디자인의 만듦새 좋은 책이었다. 디자인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던 어릴적 성향이겠지만, 지금하고 있는 일을 결정지은 것은 ‘종이’와 ‘책’이라는 미디어에 대한 호감도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한다.
최근 인쇄 감리를 보면서 겪은 상황인데, 내가 디자인한 것은 이런 색깔이 아니였는데, 내가 화면에서 보고 색을 보정했던 결과물은 저 색이 아닌데, 그 색을 구현하려니 불가능하다고 한다. 인쇄에 대한 이해가 없고, 잉크 표현의 한계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수긍을 하겠지만, 그동안 내가 해왔던 일이고, 충분히 구현 가능한 방식으로 전달해줬음에도 내 의도와는 다르게 색이 인쇄되어 나왔다. 내가 하던 방식도 틀렸고 그들이 하라고 하는 방식도 틀렸다. 결국 정확한 색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표현되는 가장 근사치에서 절충을 했을 뿐.
이런 일을 겪고 보니, 왜 굳이 이런 짜증나고 불편한 상황을 겪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됐다. 책을 만들기 위해서, 현실의 사물을 디지털로 담아서 화면 안에 띄우고 원하는 방식으로 편집해서 보기좋게 배열한 다음 다시 현실의 사물로 만들어 내는 이 과정을 생각해보니, 두 번의 재현 과정에서 손실이 없을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또 마지막 재현 과정은 더이상 손 쓸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소모적일 수 밖에 없는 과정이다.
그동안의 모든 아날로그 매체들은 이런 과정으로 컨텐츠가 소비되어 왔다. 당연한 과정이였고, 그 것 외엔 대안이 없었으므로 모두들 그 불편과 비용을 모두 감내하고 소비해왔다. 하지만 지금 여기 내가 실존하고 있는 세계에는 디지털만으로 소비되는 방식의 대안이 분명히 존재한다. 아니 오히려 최근엔 아날로그적인 컨텐츠 소비보다 더 많아졌다. 이제 아날로그로 소비하는 이유는 접근의 편리성도 아니고 비용도 아니고, 대중성 때문도 아니다. 그저 오브제로서의 기능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내가 굳이 인쇄매체를 고집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 다시 생각해본다. 분명 나는 종이와 책이라는 아날로그적 물성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그 필요의 당위성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기능적 편의와 정확성은 이미 디지털이 압도적이다. 나와 내 클라이언트들도 대부분의 컨텐츠를 디지털화된 화면으로 접하고 소비한다. 인쇄를 위해 소모하는 내 노력과 시간을 좀 더 생산적인 방식으로 전환할 수 있을꺼란 생각이 든다. 인쇄매체에 대한 제작 프로세스와 노하우, 감수성은 분명 필요하고 지속해서 갈고닦으면 좋은 것이지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니고, 안주해야 할 안락한 현실이 아니다. 단지 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컨텐츠를 담아내는 미디어의 하나일 뿐이다.
미디어는 이해하는 것이고, 미디어 자체가 의미를 담아내기도 하지만, 저물어가는 미디어를 붙들고 앉아 한발짝도 발전하지 않는다면 내가 맞이할 미래는 단 한가지 뿐이다.
늘 경계하고 발전하자. 새로움을 끊임 없이 갈구하자.
요즘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것 중에 하나가 매일 같이 마주하는 타인의 무례함이다. 그들의 공동체의 질서를 깨는 행동들, 본인 외의 어떤 누구에 대한 배려도 없는 이기적인 마음들이 자꾸만 내 신경을 자극하여 날카롭게 만든다.
아주 사소한 질서, 그러니까 특별한 선의를 바라는 게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상식적인 인간이 해야할 최소한의 매너 같은 것들 말이다. 우리가 사는 곳은 적자생존의 각박한 정글이 아니기 때문에 주변의 누군가를 존중하고 배려함으로써 질서를 지키고 역으로 스스로도 존중받는 순환 속에서 문명의 삶을 영위한다.
하지만 초등교육만 받아도 알 수 있는 이런 사실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태도를 바꿀 이유나 의지를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인 것 같다. 그들을 처벌할 수도 없고 적대할 이유도 없다. 그저 그들은 잠시 뒤로 미뤄두자. 대신 그들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선의를 가진 사람들에게 고마워하고 아주 사소한 존중과 배려를 보내자. 친절과 양보와 감사를 전하자.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아주 조금만큼이라도 세상이 바뀌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이 먹는 걸 축하하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무엇을 축하하죠?"
그러자 그들이 대답했다.
"나아지는 걸 축하합니다. 작년보다 올해 더 훌륭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그걸 축하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건 자기 자신만이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파티를 열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지요."
스무살, 가슴 한 켠에 담아 두었던 문구가 십여년 후 누군가의 음성으로 전해졌을 때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 시절 우리는 누구보다 더 반짝거리고 있었고, 오늘은 그 순간이 한 없이 그리울 뿐이다.
환상방황
방향 감각을 잃고 같은 지점을 맴도는 일을 말한다. 등산 용어로, 야간이나 악천후로 인해 목표가 불명료한 경우에 광대한 지형을 곧바로 오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원을 그리며 같은 곳을 돌고 있는 현상을 뜻하는 독일어이다. 짙은 안개, 눈보라, 폭우, 피로로 인한 사고력 둔화 등에 의해 일어난다. 이 경우는 즉시 행동을 중지하고 방향과 위치를 확인한 후 조난에 대비해야 한다. 환상방황(環狀彷徨)이라고도 한다.
5년간의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운영. 그리고 회고. 새로운 시작. 또다시 원점으로. 고리 모양의 길을 따라 같은 길을 방황하는 모습. 다시 길을 찾고 새롭게 시작함을 알리기 위한 성찰의 시간.
김애란
김영하
김훈
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