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2017. 6. 30. text

조남주

 

  • 정대현 씨는 자꾸만 아내가 낯설어졌다. 아내가, 2년을 열렬히 연애하고 또 3년을 같이 산, 빗방울처럼 많은 아야기를 나누고, 눈송이처럼 서로를 쓰다듬었던, 자신들을 반씩 닮은 예쁜 딸을 낳은 아내가, 아무래도 아내 같지가 않았다.
  • 태워 준다고? 김지영 씨는 순간 택시비를 안 받겠다는 뜻인 줄 알았다가 뒤늦게야 제대로 이해했다. 영업 중인 빈 택시를 잡아 돈 내고 타면서 고마워하기라도 하라는 건가. 배려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항의를 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고, 괜한 말싸움을 하기도 싫어 김지영 씨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 김지영 씨는 정대현 씨가 서두르는 게 왠지 기분 좋았다. 좋았는데, 좋아서 들뜨고 설레고, 폐인지 위인지 알 수 없는 몸속 어딘게에 가벼운 공기가 가득 들어차는 기분이었는데, 정대현 씨의 대답이 짧고 가느다란 바늘처럼 김지영씨의 마음에 콕, 구멍을 냈다. 부풀어 올랐던 마음은 서서히, 조금씩, 가라앉았다. 김지영 씨는 결혼식이나 혼인신고 같은 절차가 마음가짐을 바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혼인신고를 하면 마음이 달라진다는 정대현 씨가 책임감 있는 걸까, 혼인신고를 하든 안 하든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자신이 한결같은 걸까. 김지영 씨는 남편이 듬직하면서도 동시에 묘한 거리감을 느꼈다. 
사랑이라니, 선영아 2017. 6. 30. text

김연수

 

  • 왜 우리는 사랑을 '맺거나' 사랑을 '이루지' 않고 사랑에 '빠지는' 것일까? 그건 사랑이란 두 사람이 채워넣을 수 있는 가장 깊은 관계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집어넣어도 그 관계는 채워지지 않는다. 정열, 갈망, 초조, 망설임, 투정, 침착, 냉정, 이기심, 헌신, 질투, 광기, 웃음, 상실, 환희, 눈물, 어둠, 빛, 몸, 마음, 영혼 등 그 어떤 것이든 이 깊은 관계는 삼켜버린다. 모든 게 비워지고 두 사람에게 방향과 세기만 존재하는 힘, 그러니까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원초적인 감정의 움직임만 남을 때까지 그 관계속으로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밀어넣는 일은 계속된다. - p.45
  • 하지만 사랑이 끝나면 이 모든 가능성은 사라진다. 사랑의 종말이 죽음으로 비유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사랑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원래의 자신으로 되돌아가는데, 그러면서 무한히 확장됐던 '나'는 죽어버린다. 진우의 말처럼 한번 끝이 난 사랑을 다시 되돌리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죽음은 비가역적인 과정이다. 사랑의 종말도 그와 마찬가지다. 확장이 끝난 뒤에는 수축이 이어지게 된다. 사랑이 끝나게 되면 우주 전체를 품을 수 있을 만큼 확장됐던 '나'는 원래의 협소한 '나'로 수축된다. 실연이란 그 크나큰 '나'를 잃어버린 상실감이기도 하다. - p.46
  • 꽃에는 입술이 없지만 자신을 바라보고 말한다. 사랑에는 혀가 없지만 네가 누구인지 먼저 알아내라고 종용한다. 사랑을 통해 우리는 저마다 위대한 개인으로 자란다. 거울에 비친 그 위대한 개인을 사랑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해 단호한 어조로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다. -p.66
  • 기억이 아름다울까, 사랑이 아름다울까? 물론 기억이다. 기억이 더 오래가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필요하지만, 기억은 혼자라도 상관없다. 사랑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가 덧정을 쏟을 곳은 기억 뿐이다. - p.105

 

 

살인자의 기억법 2017. 6. 30. text

김영하

 

  • 아무도 읽지 않는 시를 쓰는 마음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살인을 저지르는 마음이 다르지 않다.
  • 죄책감은 본질적으로 약한 감정이다. 공포나 분노, 질투 같은 게 강한 감정이다.
  • 인간을 틀 몇 개로 재단하면서 평생을 사는 바보들이 있다.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좀 위험하다. 자신들의 그 앙상한 틀에 들어가지 않는 나 같은 인간은 가늠조차 못 할 테니까.
  • 은희가 중학생일 때 남자애들 몇이 집 근처를 얼쩡거렸다. 녀석들은 젊고 나는 그때도 이미 늙어 있었지만 나를 보고 달아나지 않은 놈들이 없었다. 욕을 하거나 겁을 준 것도 아니고 조용히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웬일인지 다들 기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꽁무니를 뺐다. 제아무리 사나운 개도 동물병원에 오면 꼬리를 말고 낑낑거려 주인들을 놀라게 한다. 십대 남자아이들도 개와 다르지 않다. 첫 대면의 눈빛이 관계를 결정한다.
  • "혼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혼돈이 당신을 쳐다본다. _니체"
  • 언제나 그랬듯이 언어는 늘 행동보다 느리고 불확실하며 애매모호하다.
  • 꽃을 오래 보고 있으면 무서웠다. 사나운 개는 작대기로 쫓지만 꽃은 그럴 수가 없다. 꽃은 맹렬하고 적나라하다. 그 벚꽃길, 자꾸 생각난다. 뭐가 그렇게 두려웠을까. 그저 꽃인 것을.
  • 과거 기억을 상실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게 되고 미래 기억을 못 하면 나는 영원히 현재에만 머무르게 된다. 과거와 미래가 없다면 현재는 무슨 의미일까. 하지만 어쩌랴, 레일이 끊기면 기차는 멈출 수밖에.
  • 설령 붙잡힌다 해도 처벌받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가끔 생각한다. 이상하다. 좋아야 하는데 별로 좋지가 않다. 인간사회로부터 정말 철저하게 버림받은 것 같은 기분. 나는 철학은 모른다. 내 안에는 짐승이 산다. 짐승에게는 윤리가 없다.
  • 사람들은 악을 이해하고 싶어한다. 부질없는 바람. 악은 무자개 같은 것이다. 다가간 만큼 저만치 물러나 있다. 이해할 수 없으니 악이지. 중세 유럽에선 후배위, 동성애도 죄악 아니었나.
  • 작곡가가 악보를 남기는 까닭은 훗날 그 곡을 다시 연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악상이 떠오른 작곡가의 머릿속은 온통 불꽃놀이겠지. 그 와중에 침착하게 종이를 꺼내 뭔가를 적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거야. 콘푸오코con fuoco-불같이, 열정적으로-같은 악상기호를 꼼꼼히 적어넣는 차분함에는 어딘가 희극적인 구석이 있다. 예술가의 내면에 마련된 옹색한 사무원의 자리. 필요하겠지. 그래야 곡도, 작곡가도 후대에 전해질 테니까.
  • 오디세우스의 여행을 생각해봐도 그렇다. 오디세우스는 귀환을 시작하자마자 연을 먹는 사람들의 섬에 기착한다. 사람들이 친절하게 권한 연 열매를 먹고 나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뿐만 아니라 부하들도 모두 잊어버린다. 무엇을? 귀환이라는 목적을 잊어버린다. 고향은 과거에 속해 있지만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계획은 미래에 속한다. 그후로도 오디세우스는 거듭하여 망각과 싸운다. 세이렌의 노래로부터도 달아나고 그를 영원히 한곳에 붙들어두려는 칼립소로부터도 탈출한다. 세이렌과 칼립소가 원했던 것은 오디세우스가 미래를 잊고 현재에 못박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끝까지 망각과 싸우며 귀환을 도모했다. 왜냐하면 현재에 머무른다는 것은 짐승의 삶으로 추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을 모두 잃는다면 더는 인간이랄 수가 없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가상의 접점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악몽 2017. 6. 8. text
별들이여 대답하라 이 불빛이 보인다면
캄캄한 하늘을 떠다니는 작은 빛 하나

한참을 난 떠다녔지 숨막히는 어둠 속을
낯설은 거리에 버려진 아이처럼

난 누굴 첮고 있는지 여기는 또 어딘지
터무니 없는 풍경에 익숙해 갈 즈음에 

갑자기 깨달았지 네가 옆에 없는 걸
괜찮아 걱정없어 이건 아마도 꿈일 테니까 
용기를 내

들어봐 어딘가에서 부르는 소리
너는 언제나 혼자가 아니지

괜찮아 견딜 수 있어 잠깐일 거야
눈부신 아침이 멀지 않았으니


桃李不言 下自成蹊 2017. 4. 24. text

도리불언 하자성혜

복숭아와 오얏은 말을 하지 않으나, (그 꽃과 열매가 좋아 사람들이 찾아오니) 밑에는 절로 길이 난다.

또다시 가르침을 주시는, 여전히 큰 스승.


@날개 파티 전

나쁘지만 좋은 것? 2014. 12. 26. text

형상이 아무리 좋은들 질료가 나쁘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좋은 것이라 할 수 없고, 반대로 질료가 좋아도 내보이고자 하는 형상이 나쁘면 그것 또한 좋다고 할 수 없다.

좋은 것은 형상과 질료가 서로 좋은 상황에서 보완되고 이끌어주는 관계여야만 가능한 것이다. 어떤 한 요소가 부족하고 모자란다면, 그것을 채우기 위해 다른 요소를 끌어와 눈속임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부족함을 채우고 좋은 것이 되고자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디자인을 요술방망이처럼 뭐든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화려한 장식과 형태만으로 부족한 내용을 메꾸고자 한다면, 필패요, 필망일 것이다. 내용이 아무리 좋은들 보기 어렵고, 매력 없어 보인다면 그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굳이 디자인 외의 것에 신경을 쓰고 비난하고, 고치고, 만들어보고자 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혼자 다 할 순 없지만, 선례를 찾고 싶은 것이다. 남이 못하고 부족하다고 불평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내가 적극적으로 해보고 부족한 부분에 대해 고민하고 조언을 구하며 적극적으로 해본다면 길은 열릴 것이란 생각이다. 

디자이너로서 디자인만 열심히 해도 부족한 상황이지만, 디자인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균형 잡힌 시각이 언젠가 빛을 발할 날이 올 것이라 믿고 있을 뿐-

몇 가지 단서들. 2014. 9. 12. text

생각의 틀.의 변화. 그 변화의 흔적을 어렴풋이 살펴 볼 수 있는 몇 가지 단서들에 대해서.

  • 영화 트랜센더스와 Her가 보여주는 근 미래의 이야기. 스스로 진화하고 연결하고 관계를 맺음으로서 새로운 환경을 재조합(re-built)한다는 것.
  • 영화 루시에서의 생명의 진화와 확장, 불교적 관점으로 근접해가는 서양 유물론적 철학의 변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물질이 있으므로 없고, 없기 때문에 물질이 있다)이라는 생명과 물질,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5000년 전 싯다르타의 깨달음에 대한 서양적, 물리학적, 진화론적 수용.
  • 들뢰즈, 가타리의 리좀 개념을 바탕으로 한 사이버 네트워크의 형태와 SNS 연결망.
  • 과거의 것에 대한 차용과 인용, 오마주(과거 콘텐츠에 대한 재해석을 넘어...).  과거와 현재, 미래의 연결
  • 보드리야르의 뫼비우스 띠 개념 혹은 순서에 대한 개념. (1번째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2번째가 존재해야하는 모순)
  • 불교적 인드라망
  • 분야의 구분과 장벽의 몰락. 통섭
  • 장회익 교수의 온생명 사상

생각 나는 단서대로 일단 적어 놓고 정리하며 생각의 틀에 대한 방향을 보고자함. 아전인수격 자의적 해석으로 객관성은 떨어질 수 있음.

변증법 2014. 7. 22. text

규정 - 비규정 - 비규정의 규정

규칙 - 비규칙 - 비규칙의 규칙

질서 - 무질서 - 무질서의 질서


正 - 反 - 合

modern - post-modern - ?


모던과 반모던의 합은 무엇일까?

대상의 질서를 찾아내 규정 짓고 규칙을 만드는 것이 모던의 특징이라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포스트모던은 혼란스러운 시대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것들이 지나간 合의 명제는 무엇이 되는 것일까? 리좀이나 네트워크 처럼 '사이버 스페이스'에 대한 주제도 어찌 보면 후기 모던시대의 또다른 후기적 특징인 듯도 하고, 여전한 포스트모던풍의 작업들로 둘러싸여 있는 현재의 대한민국이라는 환경도 혼란스럽다. 

확신할 수 없는 길을 불확실한 의지만으로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것인지, 해보지도 않고 그저 불안해하고만 있는 듯하다. 미래란 그래서 가치 있는 것이지 라는 상투적인 마음가짐만 남긴 채.

simulation 2014. 7. 16. text

실체 없는 삶.


1.

최근 생활 전반에서 대상을 직접 보거나 만지는 등 감각을 통한 체험이 이루어져서 가치를 판단하기보다는 이차적 매체-시각 매체가 대부분-를 통한 이미지와 설명, 평가 텍스트를 접하며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예로 인터넷· TV 쇼핑 같은 미디어를 통한 판단 및 구매의 과정과 같이 실체 없이 보이는 상품 이미지와 설명글, 후기글이 구매를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이미 대중화된 미디어 기기들과 소셜네트웍을 통해 번져나가는 진위를 알 수 없는 '사실'들은 무수히 많이 복제되고 확대, 재생산되어 '진실'의 여부와는 상관없는 또 다른 '진실'이 되어버리고 있다.


2.

디자인을 구분할 때-특히 시각 분야의 디자인- 흔히 매체를 기준으로 나누곤 한다. 인쇄·출판 편집 디자인, 웹(편집) 디자인, 영상 디자인 등. 그중 인쇄·출판 편집 디자인은 시각 분야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실체'를 만드는 분야인데, 이상하리만큼 그 실체를 접할 기회는 많지 않다. 최근의 인쇄·출판 분야의 시장 축소가 그 이유일 수도 있고, 그보다 근본적으로 미디어 디바이스의 성장이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실체 없이 과장되고 부풀려진 작업물과 그 평가, 그 평가를 통해 재생산된 또 다른 평가와 이미지이다. 실체보다는 매체를 통해 부풀려진 시뮬라시옹은 또 다른 description과 copy, paste, share, like, re-tweet을 통해 롤랑 바르트의 신화화 과정에서처럼 일차적 의미 위에 새로운 의미를 점점 더하게 된다.


3.

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602921&no=27&weekday=thu

위 링크의 이말년 웹툰에서 모래요괴가 유사하를 벗어나는 과정처럼, 누군가는 이런 허공을 딛고 올라가는 넌센스 한 상황을 잘 이용했다고 생각한다. 해체주의 이후의 흐름에서의 개념적 움직임들이 이런 식의 실체 없이 허공을 딛고 하늘을 오르는 경험을 이용하고 있다. 

작업A - 평가B - 작업A' - 평가B'의 사이클로 a가 A라는 포스터 작업을 했을 때 b는 a와 A에 대한 찬양에 가까운 평가로 B라는 글을 쓴다. A는 또다시 b의 글 B를 책으로 엮어 작업하고(A') b는 다시 B'라는 평론을 쓴다.

이러한 사이클이 반복적으로 진행되어 어떤 궤도에 돌입했을 때, 그들이 더이상 그 사이클을 반복하지 않아도 또다른 누군가는 또다른 매체를 통해 그 사이클을 복제하고 확대, 재생산한다. 바닥에 발이 닿기 전에 다른 발을 올려놓다보면 어느 순간 발을 움직이지 않아도 하늘에 떠있을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최초의 작업A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생경하다면 그대로 좋을 뿐이다. 유럽의 어떤 작업 방식을 떠올릴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고, 그들의 등 뒤를 지켜줄 수 있는 든든한 백그라운드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주는 매체, 교묘하게 재편집하여 새로운 컨텐츠 처럼 보일 수 있는 수완이면 충분하리라.


font 2014. 5. 15. text

정확히 말하자면 서체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 디자인에 대한 태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다지 학제적인 접근도 아니고, 어려운 이야기도 아니다(디자인이란 개념 자체가 학문이라기 보다 기능에 가깝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지 디자인을 하면서 어떤 고민이나 사고과정 없이 그저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상투적인 작업을 반복하고 있는 '태도'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일어서이다. 한참이나 오래전부터 있었던 이 역시 상투적인 이야기이지만, 여전히 눈엣가시처럼 아른거리는 것에 대한 불만의 토로이다.

대학 때 배웠던 '좋은' 폰트들이 어디에 어떤 경우에라도 '좋은' 폰트로 작용을 할 거라는 맹신 혹은 무지에 대해 당당한 디자이너 또는 전공자들을 볼 때마다 나는 항상 불만에 가득 차곤 한다. 그들은 디자인을 전공했다는 알량한 자만감으로 폰트의 '좋고' '나쁨'을 구분하고 헬베티카, 개러몽, 타임즈 로만 등 전통적인 서체들이나 기능적으로 군더더기 없는 딘 서체 등 특정 몇몇 서체만을 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미 오래전부터 기능주의적인 디자인보다는 좀 더 새롭고 다양한 관점의 디자인이 힘을 얻고 있었고, 이러한 시점에서 더는 기능에 초점을 맞춰 서체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음은 당연한 듯 해 보인다. 딩벳 폰트를 사용한 포스터, 본문용 서체로 타입라이트나 OCR 같은 서체의 활용, 메타 폰트 같은 손글씨 요소를 차용한 서체의 등장 등 다양한 새로운 방향이 이미 제시되었고, 국내에서도 디자인에 잘 사용하지 않았던 굴림체를 활용한 디자인이나, 한글 레터링, 개인 디자이너들의 대안적 서체들의 제작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서체에 대한 새로운 방향이 제시되고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이나 좁게는 쉽게 지나가는 유행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생각을 해본다면 (물론 무작정 유행을 좇는 작업 또한 당연히 배제돼야 할 태도임은 분명하지만) 관습적인 서체 선택이나 사용이 얼마나 멍청하고 심미적이지 못한 일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태도가 얼마나 게으르고 무책임한지. 깨닿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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