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주
김연수
김영하
도리불언 하자성혜
복숭아와 오얏은 말을 하지 않으나, (그 꽃과 열매가 좋아 사람들이 찾아오니) 밑에는 절로 길이 난다.
또다시 가르침을 주시는, 여전히 큰 스승.
@날개 파티 전
형상이 아무리 좋은들 질료가 나쁘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좋은 것이라 할 수 없고, 반대로 질료가 좋아도 내보이고자 하는 형상이 나쁘면 그것 또한 좋다고 할 수 없다.
좋은 것은 형상과 질료가 서로 좋은 상황에서 보완되고 이끌어주는 관계여야만 가능한 것이다. 어떤 한 요소가 부족하고 모자란다면, 그것을 채우기 위해 다른 요소를 끌어와 눈속임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부족함을 채우고 좋은 것이 되고자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디자인을 요술방망이처럼 뭐든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화려한 장식과 형태만으로 부족한 내용을 메꾸고자 한다면, 필패요, 필망일 것이다. 내용이 아무리 좋은들 보기 어렵고, 매력 없어 보인다면 그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굳이 디자인 외의 것에 신경을 쓰고 비난하고, 고치고, 만들어보고자 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혼자 다 할 순 없지만, 선례를 찾고 싶은 것이다. 남이 못하고 부족하다고 불평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내가 적극적으로 해보고 부족한 부분에 대해 고민하고 조언을 구하며 적극적으로 해본다면 길은 열릴 것이란 생각이다.
디자이너로서 디자인만 열심히 해도 부족한 상황이지만, 디자인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균형 잡힌 시각이 언젠가 빛을 발할 날이 올 것이라 믿고 있을 뿐-
생각의 틀.의 변화. 그 변화의 흔적을 어렴풋이 살펴 볼 수 있는 몇 가지 단서들에 대해서.
생각 나는 단서대로 일단 적어 놓고 정리하며 생각의 틀에 대한 방향을 보고자함. 아전인수격 자의적 해석으로 객관성은 떨어질 수 있음.
규정 - 비규정 - 비규정의 규정
규칙 - 비규칙 - 비규칙의 규칙
질서 - 무질서 - 무질서의 질서
正 - 反 - 合
modern - post-modern - ?
모던과 반모던의 합은 무엇일까?
대상의 질서를 찾아내 규정 짓고 규칙을 만드는 것이 모던의 특징이라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포스트모던은 혼란스러운 시대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것들이 지나간 合의 명제는 무엇이 되는 것일까? 리좀이나 네트워크 처럼 '사이버 스페이스'에 대한 주제도 어찌 보면 후기 모던시대의 또다른 후기적 특징인 듯도 하고, 여전한 포스트모던풍의 작업들로 둘러싸여 있는 현재의 대한민국이라는 환경도 혼란스럽다.
확신할 수 없는 길을 불확실한 의지만으로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것인지, 해보지도 않고 그저 불안해하고만 있는 듯하다. 미래란 그래서 가치 있는 것이지 라는 상투적인 마음가짐만 남긴 채.
실체 없는 삶.
1.
최근 생활 전반에서 대상을 직접 보거나 만지는 등 감각을 통한 체험이 이루어져서 가치를 판단하기보다는 이차적 매체-시각 매체가 대부분-를 통한 이미지와 설명, 평가 텍스트를 접하며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예로 인터넷· TV 쇼핑 같은 미디어를 통한 판단 및 구매의 과정과 같이 실체 없이 보이는 상품 이미지와 설명글, 후기글이 구매를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이미 대중화된 미디어 기기들과 소셜네트웍을 통해 번져나가는 진위를 알 수 없는 '사실'들은 무수히 많이 복제되고 확대, 재생산되어 '진실'의 여부와는 상관없는 또 다른 '진실'이 되어버리고 있다.
2.
디자인을 구분할 때-특히 시각 분야의 디자인- 흔히 매체를 기준으로 나누곤 한다. 인쇄·출판 편집 디자인, 웹(편집) 디자인, 영상 디자인 등. 그중 인쇄·출판 편집 디자인은 시각 분야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실체'를 만드는 분야인데, 이상하리만큼 그 실체를 접할 기회는 많지 않다. 최근의 인쇄·출판 분야의 시장 축소가 그 이유일 수도 있고, 그보다 근본적으로 미디어 디바이스의 성장이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실체 없이 과장되고 부풀려진 작업물과 그 평가, 그 평가를 통해 재생산된 또 다른 평가와 이미지이다. 실체보다는 매체를 통해 부풀려진 시뮬라시옹은 또 다른 description과 copy, paste, share, like, re-tweet을 통해 롤랑 바르트의 신화화 과정에서처럼 일차적 의미 위에 새로운 의미를 점점 더하게 된다.
3.
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602921&no=27&weekday=thu
위 링크의 이말년 웹툰에서 모래요괴가 유사하를 벗어나는 과정처럼, 누군가는 이런 허공을 딛고 올라가는 넌센스 한 상황을 잘 이용했다고 생각한다. 해체주의 이후의 흐름에서의 개념적 움직임들이 이런 식의 실체 없이 허공을 딛고 하늘을 오르는 경험을 이용하고 있다.
작업A - 평가B - 작업A' - 평가B'의 사이클로 a가 A라는 포스터 작업을 했을 때 b는 a와 A에 대한 찬양에 가까운 평가로 B라는 글을 쓴다. A는 또다시 b의 글 B를 책으로 엮어 작업하고(A') b는 다시 B'라는 평론을 쓴다.
이러한 사이클이 반복적으로 진행되어 어떤 궤도에 돌입했을 때, 그들이 더이상 그 사이클을 반복하지 않아도 또다른 누군가는 또다른 매체를 통해 그 사이클을 복제하고 확대, 재생산한다. 바닥에 발이 닿기 전에 다른 발을 올려놓다보면 어느 순간 발을 움직이지 않아도 하늘에 떠있을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최초의 작업A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생경하다면 그대로 좋을 뿐이다. 유럽의 어떤 작업 방식을 떠올릴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고, 그들의 등 뒤를 지켜줄 수 있는 든든한 백그라운드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주는 매체, 교묘하게 재편집하여 새로운 컨텐츠 처럼 보일 수 있는 수완이면 충분하리라.
정확히 말하자면 서체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 디자인에 대한 태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다지 학제적인 접근도 아니고, 어려운 이야기도 아니다(디자인이란 개념 자체가 학문이라기 보다 기능에 가깝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지 디자인을 하면서 어떤 고민이나 사고과정 없이 그저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상투적인 작업을 반복하고 있는 '태도'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일어서이다. 한참이나 오래전부터 있었던 이 역시 상투적인 이야기이지만, 여전히 눈엣가시처럼 아른거리는 것에 대한 불만의 토로이다.
대학 때 배웠던 '좋은' 폰트들이 어디에 어떤 경우에라도 '좋은' 폰트로 작용을 할 거라는 맹신 혹은 무지에 대해 당당한 디자이너 또는 전공자들을 볼 때마다 나는 항상 불만에 가득 차곤 한다. 그들은 디자인을 전공했다는 알량한 자만감으로 폰트의 '좋고' '나쁨'을 구분하고 헬베티카, 개러몽, 타임즈 로만 등 전통적인 서체들이나 기능적으로 군더더기 없는 딘 서체 등 특정 몇몇 서체만을 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미 오래전부터 기능주의적인 디자인보다는 좀 더 새롭고 다양한 관점의 디자인이 힘을 얻고 있었고, 이러한 시점에서 더는 기능에 초점을 맞춰 서체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음은 당연한 듯 해 보인다. 딩벳 폰트를 사용한 포스터, 본문용 서체로 타입라이트나 OCR 같은 서체의 활용, 메타 폰트 같은 손글씨 요소를 차용한 서체의 등장 등 다양한 새로운 방향이 이미 제시되었고, 국내에서도 디자인에 잘 사용하지 않았던 굴림체를 활용한 디자인이나, 한글 레터링, 개인 디자이너들의 대안적 서체들의 제작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서체에 대한 새로운 방향이 제시되고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이나 좁게는 쉽게 지나가는 유행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생각을 해본다면 (물론 무작정 유행을 좇는 작업 또한 당연히 배제돼야 할 태도임은 분명하지만) 관습적인 서체 선택이나 사용이 얼마나 멍청하고 심미적이지 못한 일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태도가 얼마나 게으르고 무책임한지. 깨닿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