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집이 생겼다는 사실에 꽤 얼떨떨했다. 명의만 내 것일 뿐 여전히 내 집이 아닌데도 그랬다. 이십여 년간 셋방을 부유하다 이제 막 어딘가 가늘고 연한 뿌리를 내린 기분. 씨앗에서 갓 돋은 뿌리 한 올이 땅속 어둠을 뚫고 나갈 때 주위에 퍼지는 미열과 탄식이 내 몸안에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p.13 (입동)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얼굴로 잤다. 신기한 것 그렇게 짧은 잠을 청하고도 눈뜨면 그사이 살이 오르고 인상이 변해 있다는 거였다. 아이들은 정말 크는 게 아까울 정도로 빨리 자랐다. 그리고 그런 걸 마주한 때라야 비로소 나는 계절이 하는 일과 시간이 맡은 몫을 알 수 있었다. 3월이 하는 일과 7월이 해낸 일을 알 수 있었다. 5월 또는 9월이라도 마찬가지였다. -p.18 (입동)
그러니까 어제와 같은 하루, 아주 긴 하루, 아내 말대로라면 '다 엉망이 되어버린' 하루를. 가끔은 사람들이 '시간'이라 부르는 뭔가가 '빨리 감기' 한 필름마냥 스쳐가는 기분이 들었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한. 점점 그 폭을 좁혀 소용돌이를 만든 뒤 우리 가족을 삼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이유도, 눈이 녹고 새순이 돋는 까닭도 모두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시간이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편드는 듯했다. -pp.20-21 (입동)
찬성은 아버지가 휴대전화 손전등 기능을 이용해 천장에 빛을 쏜 걸 기억했다. 벽에 비친 개 그림자는 그 빛으로 만든 거였다. 찬성이 두 쌍의 손가락을 벌렸다 오므리며 개 짖는 시늉을 했다. 빛이 없어 자기 그림자를 갖지 못한 작은 개가 찬성의 손목 아래서 자꾸 소리 없이 짖어댔다. -p.45 (노찬성과 에반)
이수는 자기 근황도 그런 식으로 돌았을지 모른다고 짐작했다. 걱정을 가장한 흥미의 형태로, 죄책감을 동반한 즐거움의 방식으로 화제에 올랐을 터였다. 누군가의 불륜, 누군가의 이혼, 누군가의 몰락을 얘기할 때 이수도 그런 식의 관심을 비친 적 있었다. -p.92 (건너편)
당시 이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도화 혼자 어른이 돼가는 과정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일이었다. 도화의 말투와 표정, 화제가 변하는 걸, 도화의 세계가 점점 커져가는 걸, 그 확장의 힘이 자신을 밀어내는 걸 감내하는 거였다. -pp. 98-99 (건너편)
도화가 오들오들 떨며 현관문을 열면 따뜻한 두 손으로 언 귀를 녹여주던 모습과 여름이면 도화 쪽으로 바람이 더 가도록 선풍기 각도를 조절해주던 이수의 옆얼굴도. 그때서야 도화는 어제 오후, 주인아주머니를 만난 뒤 자신이 느낀 게 배신감이 아니라 안도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수 쪽에서 먼저 큰 잘못을 저질러주길 바라왔던 것마냥. -p.118 (건너편)
나에게는 오래된 이름이 있다. 그 이름은 길다. 그 이름을 다 부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평생이 필요하다. 어떤 이는 그것도 너무 짧은 기간이라 말한다. 몇백 혹은 수천 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불러야 겨우 호명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도 누가 정말 그걸 다불렀다면 그때 그가 발견하는 건 내 이름의 길이가 배로 늘어났다는 사실일 거라 말한다. 내 이름을 듣고 나도 내 이름을 잊었다. 내 이름이 궁금할 적마다 나는 내 이름이었거나 내 이름의 일부였을 지 모를 기억을 더듬는다. 그러면 어렴풋이 몇몇 단서가 떠오른다. -p.123 (침묵의 미래)
중앙은 멸종 위기에 처한 언어를 보호하고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이 단지를 세웠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리고 그건 중앙에서 내심 바라는 바였다. 그들은 잊어버리기 위해 애도했다. 멸시하기 위해 치켜세웠고, 죽여버리기 위해 기념했다. -p.132 (침묵의 미래)
그가 눈감기 전 모습이 떠오른다. 감정을 가진 로봇처럼 기계음을 내며 몸을 떨던 검은 얼굴이 생각난다. 그가 "우어어, 흐어어"하고 웅얼댈 때 그것은 빙하가 무너지는 풍경과 비슷했다. 수백만 년 이상 엄숙하고 엄연하게 존재하다 한순간에 우르르 무너지는 얼음의 표정과 흡사했다. 그것은 무척 고요하고 장엄했지만 한편으론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보였다. 뭐랄까, 세상에 아무 반향도 일으키지 못하는 멸망, 침몰을 목격하는 기분이었다. -p.143 (침묵의 미래)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종종 버스 창문에 얼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p.173 (풍경의 쓸모)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재이야, 어른들은 잘 헤어지지 않아. 서로 포개질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하는 게 반드시 이별을 의미하지도 않고. 그건 타협이기 전에 타인을 대하는 예의랄까, 겸손의 한 방식이니까. 그래도 어떤 인간들은 결국 헤어지지. 누가 꼭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서로 고유한 존재 방식과 중력 때문에. -p.213 (가리는 손)
남편을 잃기 전, 나는 내가 집에서 어떤 소리를 내는지 잘 몰랐다. 같이 사는 사람의 기척과 섞여 의식하지 못했는데, 남편이 세상을 뜬 뒤 내가 끄는 발 소리, 내가 쓰는 물 소리, 내가 닫는 문 소리가 크다는 걸 알았다. 물론 그중 가장 큰 건 내 '말소리' 그리고 '생각의 소리'였다. 상대가 없어, 상대를 향해 뻗어나가지 못한 시시하고 일상적인 말들이 입가에 어색하게 맴돌았다. 두 사람만 쓰던, 두 사람이 만든 유행어, 맞장구의 패턴, 침대 속 밀담과 험담, 언제까지 계속될 것 같던 잔소리, 농담과 다독임이 온종일 집안을 떠다녔다. -p.228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p.266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S
2017. 7. 11.
drawing
S @ Forest of music
20170705
2017. 7. 11.
photo
@Kwanghwamun
빛의 제국
2017. 7. 11.
text
김영하
우리가 감정에 일일이 어떤 표식을 부착할 수 있다면 누군가는 그 순간의 그의 감정을 '너무 일찍 도착한 향수(鄕愁)'라 명명했을 것이다. -p.55
"애들이 동물원에서 원숭이들한테 돌을 던지고 애견센터 진열장을 주먹으로 쳐서 강아지들을 놀라게 하는 건, 사실은 대화를 하고 싶어서라더군요. 반응이 없으니가 아이들이 지들 방식으로 말을 건네는 거랍니다." -p.79
그보다는 장마철의 큰물, 그리고 함께 휩쓸려 떠내려오는 것들 ; 허우적대는 황소, 자개장롱의 문짝, 임신한 버크셔 암퇘지, 벌겋게 들끓는 흙탕물의 거품, 벌목된 리기다소나무의 가지, 성급한 등산객의 사체, 스티로폼 부표를 망라하는 그 모든 것들의 흐름에 더 가까웠다. -p.93
속물이 속물인 것을 감추려면 쿨할 수밖에 없다. 쿨과 냉소가 없다면 그들의 속물성은 금세 무자비한 햇빛 아래 알몸을 드러낼 것이다. -p.112
그는 젊고 앞으로도 한동안 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늙어가고 있다. 그것은 숨길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p.157
아니, 종로의 모든 것이 익숙하면서 또한 낯설었다. 종로는 처음에도 낯설지 않았고 이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익숙해지지 않는 거리였다. 그곳은 서울의 중심이지만 어쩐지 늘 변방 같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서울다웠다. -p.168
만약 이 세계에 기독교라는 곳에서 말하는 연옥이라는 게 정말 있다면 바로 그곳일 것이다. 그들은 피안도 차안도 아닌 점이지대에서 아무것도 절박할 것이 없는 삶을 계속해나가고 있었다. -p.174
고등학교 시절엔 그렇게 공부를 잘해서 온 학교의 선생님들한테 귀염을 받던 내가 왜 그 이후엔 어디에서도, 단 한 번도 두각을 나타낸 적이 없을까? 혹시 이것은 누군가의 음모가 아닐까? 이 모든 것이 내가 저지른 과오 때문이라는 결론은 받아들일 수 없다. 누군가의 집요한 악의가,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잘 나가고 있던 내 삶의 행로를 슬쩍 뒤틀어놓은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p.191
막상 그런 질문을 받자 할말이 없었다. 그리고 참으로 오랫동안 그런 문제에 대해 한 번도 고민해본 적이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어린 학생들은 때로 어른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근본적인 질문을 품었다. -p.206
그러나,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폴 발레리의 시구처럼, 그는 운명을 잊고 있었지만 운명은 그를 잊지 않고 있었다. -p.221
"내가 알기론, 무지가 인류에 도움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어. 무지는 모든 무의미한 폭력의 원천이었다구." -p.308
그런데 하나의 절차가 다른 하나의 절차를 물고 들어갔다. 작은 결정이 또다른 작은 결정으로 이어졌고, 마침내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p.347
"잘 들어봐.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게 돼. 나한테도 여러 번 그런 순간들이 있었어. 그 선택들이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된 거야. ... -p.382
악몽은 기영에게 오래 기른 늙은 개 같은 존재였다. 그를 대신하여 짖어주었고 그를 대신하여 앓아주었다. 떼어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늘 함께 다닐 수도 없는...... -p.395
20170705
2017. 7. 6.
photo
@ your-mind, Yeonhee-dong
20170704
2017. 7. 4.
photo
Grooming @Hongeun-dong
공터에서
2017. 7. 3.
text
김훈
시화호에서 새들을 보면서 너를 생각했어. 너의 생명을 흐르는 시간과 나의 생명을 흐르는 시간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만나는 것인지, 섞이는 것인지를 생각했고, 그런 생각을 화폭에 그려보려는 생각을 했어. 새들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을 거야.
박상희의 목소리는 늘 비음(鼻音)이 섞여 있었다. '휴가 나왔니?'라고 말할 때 '니?'가 코 속에서 울렸다. 코 속이 아니라, 몸속의 깊은 동굴에서 울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니?'는 말하는 사람의 몸속을 통과해 나온 물기로 젖어 있었다. 박상희의 '니?'를 그림으로 그리자면 물 위에 번지는 동심원(同心圓)이 되겠지. 그 동그란 파문이 전화선을 타고 와서 마차세의 귀를 통해 몸속으로 들어왔다. '니?'는 동부전선 산악 고지와 서울 간의 거리를 단숨에 뛰어넘어서 마차세를 '니?' 앞으로 몰아세웠다.
초병들은 찬 안개를 마시면서 안개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안개는 안과 밖이 없고 앞과 뒤가 없어서 안개 속에서 초병들은 자신의 위치를 식별할 수 없었다. 철책선과 적 GP들이 지워졌다. 가늠구멍 안에 안개가 가득 차서 초병들은 아무 곳도 조준할 수 없었다. 이따금씩 안개가 갈라지는 새벽에 먼 고지의 윤곽이 어둠 속을 흘러갔다.
마차세는 산악고지의 봄 안개와 피라미의 죽음을 박상희에게 편지로 말하고 싶었지만 쓰지 못했다. 안개는 글로 잡히는 것이 아니었고, 피라미의 죽음은 글로 쓰기에는 너무나 사소했다.
요즘, 꽃 핀 벚나무를 그리고 있는데, 그림 속에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기가 힘들어. 핀 꽃이 아니라 피어오는 꽃, 피어있는 꽃을 그리고 싶어. 그걸 그리자면 밑그림이 없이 바로 붓질을 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아. 너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밑그림 없는 세상을 생각했어. 꽃 핀 나무를 그리면서, 니 얼굴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어. 꽃 핀 나무를 들여다보는 니 얼굴, 니 얼굴에 살아 있는 시간을 그리고 싶었어. 밑그림 없이 말이야.
잿물을 풀고 막대기로 저으면 핏물이 우러나왔다. 산악 부대의 피와 해안 부대의 피, 중공군의 피와 인민군의 피, 국군의 피와 학도병의 피, 상등병의 피와 대위의 피가 섞였다. 핏물에서 비린내가 났다.
웨이터가 다금바리리구이를 가져왔다. 다금바리 등에 보랏빛 윤기가 흘렀다. 마장세는 나이프로 아가미를 벌렸다. 분홍색 빗살이 드러났고, 빗살 사이의 깊이가 어두워 보였다. 고요한 아가미였다.
사람들은 난을 피하려고 피난지로 몰려왔지만 세상의 모든 환란은 피난지로 몰려들었다.
마장세가 훈장을 받던 날 어머니의 편지가 도착했다. 어머니의 글씨는 가나다라를 겨우 엮어가면서 비틀거렸는데, 혈연으로부터 달아나는 일의 어려움을 일깨워주었다.
벗어날 수 없는 굴레니까 무서운 거겠지. 우리 형제는 모두 어버지 닮았어.
어둠에 파도 소리가 스몄다. 파도가 절벽을 때리고 깨질 때 푸른 인광이 일었다. 파도가 들어올 때, 소리는 어둠을 뒤덮으면서 밀려왔고, 파도가 물러설 때 소리는 어둠 너머로 밀려 나갔다. 들어오는 소리는 가득 찼고, 나가는 소리는 비어 있었는데, 발생 이전의 소리처럼 음정(音程)으로 구분되지 않았다.
박상희는 마차세의 그 막막함과 서두름을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세상을 멀리 빙 돌아서 다가오는 사랑의 우원한 회로를 마체세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때 마차세는 결혼이 그 막막한 세상에서 몸 비빌 수 있는 작은 '거점'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박상희는 생활을 구성하는 온갖 작고 하찮은 것들이 쌓여서, 그것들이 서로 인연을 이루고 질감을 빚어내서 마차세의 시간을 메워주기를 바랐다.
박상희는 아이들이 손바닥으로 느끼는 소나무 껍질의 느낌이 아이들의 마음에 깊이 저장되어 있다가 종이 위에서 선이나 색으로 드러나기를 바랐다. 느낌의 내용을 말로 타인에게 전해 줄 수는 없었고 느낌을 느끼게 해주는 것만이 교사의 일이라고 박상희는 생각했다.
사물을 손으로 주무르고 거기에 몸을 비비지 않고서는 종이 위에 선을 그을 수 없다는 것을 박상희는 남에게 이해시킬 수 없었고 왜 그런지를 자신에게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박상희는 일상의 사소한 것들의 질감이 마차세의 마음속에 쟁여지기를 바랐다.
몸속을 덮은 안개 속에서 해독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수런거리면서 이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 아직 발생하지 못한 세포들이 숨 쉬는 소리 같기도 했고, 우주공간을 날아가는 별들의 소리 같기도 했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무어라고 말하고 있었고, 말하고 있었지만 아직 말이 되어지지 않은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