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했던 것은 종이에 인쇄된 그래픽과 잘 정돈된 디자인의 만듦새 좋은 책이었다. 디자인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던 어릴적 성향이겠지만, 지금하고 있는 일을 결정지은 것은 ‘종이’와 ‘책’이라는 미디어에 대한 호감도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한다.
최근 인쇄 감리를 보면서 겪은 상황인데, 내가 디자인한 것은 이런 색깔이 아니였는데, 내가 화면에서 보고 색을 보정했던 결과물은 저 색이 아닌데, 그 색을 구현하려니 불가능하다고 한다. 인쇄에 대한 이해가 없고, 잉크 표현의 한계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수긍을 하겠지만, 그동안 내가 해왔던 일이고, 충분히 구현 가능한 방식으로 전달해줬음에도 내 의도와는 다르게 색이 인쇄되어 나왔다. 내가 하던 방식도 틀렸고 그들이 하라고 하는 방식도 틀렸다. 결국 정확한 색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표현되는 가장 근사치에서 절충을 했을 뿐.
이런 일을 겪고 보니, 왜 굳이 이런 짜증나고 불편한 상황을 겪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됐다. 책을 만들기 위해서, 현실의 사물을 디지털로 담아서 화면 안에 띄우고 원하는 방식으로 편집해서 보기좋게 배열한 다음 다시 현실의 사물로 만들어 내는 이 과정을 생각해보니, 두 번의 재현 과정에서 손실이 없을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또 마지막 재현 과정은 더이상 손 쓸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소모적일 수 밖에 없는 과정이다.
그동안의 모든 아날로그 매체들은 이런 과정으로 컨텐츠가 소비되어 왔다. 당연한 과정이였고, 그 것 외엔 대안이 없었으므로 모두들 그 불편과 비용을 모두 감내하고 소비해왔다. 하지만 지금 여기 내가 실존하고 있는 세계에는 디지털만으로 소비되는 방식의 대안이 분명히 존재한다. 아니 오히려 최근엔 아날로그적인 컨텐츠 소비보다 더 많아졌다. 이제 아날로그로 소비하는 이유는 접근의 편리성도 아니고 비용도 아니고, 대중성 때문도 아니다. 그저 오브제로서의 기능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내가 굳이 인쇄매체를 고집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 다시 생각해본다. 분명 나는 종이와 책이라는 아날로그적 물성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그 필요의 당위성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기능적 편의와 정확성은 이미 디지털이 압도적이다. 나와 내 클라이언트들도 대부분의 컨텐츠를 디지털화된 화면으로 접하고 소비한다. 인쇄를 위해 소모하는 내 노력과 시간을 좀 더 생산적인 방식으로 전환할 수 있을꺼란 생각이 든다. 인쇄매체에 대한 제작 프로세스와 노하우, 감수성은 분명 필요하고 지속해서 갈고닦으면 좋은 것이지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니고, 안주해야 할 안락한 현실이 아니다. 단지 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컨텐츠를 담아내는 미디어의 하나일 뿐이다.
미디어는 이해하는 것이고, 미디어 자체가 의미를 담아내기도 하지만, 저물어가는 미디어를 붙들고 앉아 한발짝도 발전하지 않는다면 내가 맞이할 미래는 단 한가지 뿐이다.
늘 경계하고 발전하자. 새로움을 끊임 없이 갈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