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녀는 더이상 단것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지만, 이따금 각설탕이 쌓여 있는 접시를 보면 귀한 무엇인가를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기자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p. 81
글자풍경
2019.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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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원, <글자풍경>, 2019, 을유문화사
지구상에는 다양한 생물이 있고, 그처럼 자연과 뗄 수 없는 다양한 풍토와 다양한 언어, 다양한 문자, 다양한 글자체들이 있다. 지구를 아끼는 마음에는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이 포함된다. 새로운 것을 접촉하고 다름을 인정하면 인식이 확장되고 여유가 생기며 관대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들이 서로 고립되지 않도록 연대와 협력이 필요하다. 글로벌과 로컬을 아우르는 폭넓은 관점으로서 '간지역적(inter-local)'인 시각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양자가 균형을 유지하며 공존해야 문화가 활력을 유지할 수 있다. -p. 85
...사람도 그렇고 글자도 그렇고, 어떤 대상에 대해 완전하게 안다고 여기는 데에서 오해와 오독이 생겨난다. 독일어에 이런 말이 있다. "Man lernt nie aus." 아무리 잘 알아도 모르는 것은 항상 남아 있으니, 겸손하라는 뜻이다. -p. 93
다른 문화를 접하면 우리 문화 속 익숙하다 못해 관성적이고 먼지 쌓인 시선으로 보던 요소들의 본질을 한 줄기 바람 같은 싱그러운 시각으로 다시 보게 된다. 한글과 로마자의 글자들 사이는 아람 문자처럼 식물이나 작은 부호들이 장식적으로 채워져 있지는 않다. 검은 글자의 형상 사이에 흰 공간이 있다. 하지만 이 흰 공간조차도 사실은 비어 있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아랍 문자를 보며 새삼 환기한다. 글자 사이의 흰 공간은 배경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글자와 글자를 응집력 있게 연결하는 뚜렷한 역할을 하고, 엄연한 면적과 형상을 가진 실체다. 그래서 이 흰 공간은 사실 '빈 공간' 이 아니라 글자의 검은 확들을 역형상화한 '카운터(counter)', 즉 '대응 공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맞다. -pp. 118-119
나는 여전히 대학의 기초 타이포그래피 과정에서 색채 없이 검정색과 흰색만 남기고 기하학적인 비례와 형상에 집중하게끔 교육한다. 하지만 이런 부득이한 교육적 제한과 개인들의 좁은 경험을 전부라고 여겨, 타인이 나름의 타당성을 갖춰 쌓아온 이질적인 세계에 대해 훈시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한다. 세계의 어떤 사람들은 글자에서 무엇보다도 색채를 적극 끌어안는다는 사실을 한번씩 상기한다. -p. 129
한국어 음성상징에서 긍정적인 측면의 심상만 보자면, '사랑'의 ㅅ은 생(生)을 연상시키고 ㄹ은 활력(活)을 일으킨다. ㅅ은 에너지이고, ㄹ은 운동을 떠오르게 한다. 양성모음 ㅏ는 내적으로 수렴하는 음성모음 ㅓ와 달리 외부를 향해 확장되고 열려 있다. 마치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에너지처럼. 사람은 멈춰 있고 사랑은 굴러간다. 사랑이 사람 사이에 흘러 들어 서로를 연결한다. '사랑'이라는 한국어 단어 속에서는 소리와 뜻과 모양조차 이렇게 서로 사랑을 한다. -p. 137
하지만 '3 더하기 4'의 답을 알았다고 해서,. 그 지식이 '7 더하기 9'의 답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러면 덧셈표를 작성해서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일일이 찾아봐야 할까? 그보다는 '덧셈'의 원리를 배우는 편이 바람직하다. '기능적인 타이포그래피'에서는 항들을 상정해서 사칙연산이든 더 복잡한 계산이든 '관계식'을 세우는 방식으로 문제를 하나하나 차분하게 풀어나간다. -p. 163
좋은 본문 타이포그래피와 기능적인 본문용 폰트는 시간을 두고 읽어봐야 그 진가를 안다. 수백 쪽에 달하는 긴 본문에 쓰이는 글자는 마라톤을 할 때 신는 러닝화와 같아서, 인체의 피로를 덜어 주어야 디자인이 잘된 것이다. 신고 오래 뛰어봐야 졸은 줄 알지, 겉만 대강 봐서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면서 스타일도 좋고 정서적을도 친화적이어야 좋은 본문용 폰트다. -p. 164
정답은 하나만 있지 않다. 가장 논리적인 답이 항상 가장 좋은 답인 것도 아니다. 각각의 문제마다 각각의 해결책이 있고, 때론 즐겁고 엉뚱한 해결책이 좋은 답이 될 수도 있다. 논리와 체계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래도 가끔 머릿속이 경직될 땨, 길 산스 울트라 볼드 i를 떠올려 본다. 코끼리 다리처럼 두껍고 윗부분이 오목한 쟁반 위에 비대칭으로 놓인 작은 구슬이 구르는 듯한 저 모습, 과도하지 않으면서도 기발한 저 해결책을,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해냈을까? 이 모습을 보면 긴장이 풀리고 웃음이 나고 용기가 생긴다. -p. 243